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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겪다/독서의 즐거움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Byeonpd 2016. 12. 24. 03:13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 부채사회 해방선언 








-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이렇게나 비정규 직종의 일이 많은데 일을 얻지 못하는 것은 네 탓이다, 일하라, 어서 일하라, 뭐라도 하라!

그러나 생각해 보자.
모두 진심으로 절실히 일하고 싶어 할까. 오히려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으니 해고가 되거나 일자리를 얻기 힘들 때는 돈을 받으면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까.
아니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일자리 찾기가 힘드니까 서로 도와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상호부조야말로 원래 노동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춤추고 싶을 만큼 즐거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노동이 아닐까.
놀고 싶다.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격언이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정보를 듣고 그것을 인지하여 거기에 반응하는 것만을 중요시한다. 그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을, 한마디로 말해서 귀만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 파혼


"더는 못 참겠어.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나 한 거야? 사회인으로, 성인으로 착실히 역할을 해 낸다는 것, 정규직 일자리를 얻고 매일 괴로운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그것을 끝까지 해 내는 것이 어른이야. 하고 싶은 일 같은 것만 해서는 안 돼.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잖아.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니 다 큰 어른이 할 소리야, 그게? 그건 애들이나 하는 응석이라고."



내 또래 중에는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저 상대를 소중하게 여겼고 그래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결혼이라는 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자기 생각만 하게 되어 버린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위 커플 역할을 연기하고 그것을 잘 해내는 것이 상대를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서로 자기가 희생했다고 생각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그 부채를 쌓아 나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순수하게 좋아했던 감정이 손실계산으로 바뀌어 버린다. 자신은 팽개쳐 두고 상대를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던 것을 자기 이익으로 환산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 이익으로 환산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 이익이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긍정되어 버리니 더 좋지 않다.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으면서 마치 아름다운 이타적 정신의 소유자인 척하는 것이다.

나는 내 연애가 파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내내 이토 노에의 글을 읽었다.











-모토오리


모토오리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희노애락이 있고, 거기에는 깊고 얕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 전부가 '모노노아하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의 정을 느끼는 데는 사랑이 제일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깊어서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고대이래 지금까지의 시 중에서도 그 정취를 노래한 것이 많고, 걸작들 중에서도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오늘날의 노래에서도 사랑과 관계된 것이 많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인간의 마음도 진실로 그렇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원망스러운 것도 화나는 것도 즐거운 것도 기쁜 것도 있기 마련이니 인간 감정의 모든 것이 사랑 속에 모여 있다.








유교든 불교든 사람의 연정에 선약의 기준을 들이대면 엉망이 된다. 애초에 자유롭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죽어 있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위해서인지,사회질서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것을 위해서 이래서는 안 된다, 저래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든 있게 마련인 순수한 감정이 일순간에 잘려나가고 만다. 

정치,사회,도덕. 웃기는 소리다. 모토오리는 모든 인위적 조작에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란 없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없다.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사랑해 버려라.









-장자


장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소멸하며 그로 인해 다른 생명의 일부가 되어 다시 살아난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다를 바 없다. 생물도 무생물도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힘을 빼앗고 빼앗기며 그리하여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만물은 생멸변화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끼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연애 같은 것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자신의 힘을 빼앗긴다. 그 과정에서 의식하든 하지 않든 이쪽에서도 상대의 힘을 빼앗아, 우적우적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와 함께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쾌락에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이란 변변찮은 존재라 새로운 것으로 변화한다든가, 썩어 문드러진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무서워지고 만다. 나만은 다르다고, 나만은 먹어치우는 쪽이라고, 빼앗는 쪽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평소에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일단 배가 고파서 먹잇감을 눈앞에 두게 되면 이미 자신의 이해관계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 나는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후에 어느 활동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이렇게 모두 함께 무엇을 먹을지 정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고 어쨌든 무기력해지기 쉬운 사람들이 스스로 할 일을 정하는 훈련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 산야의 사람들은 이것을 공동취사라고 부른다.












- 후나모토의 시민사회



보상 같은 것 바라지 않고 타인에게 잘 대해 주는 그 마음이 고귀하다. 그러나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부수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시민사회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며 어떻게 하면 쫓아내 버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시민사회라는 놈을 솔직히 나는 망쳐 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는 짝을 찾고 가족을 만들어 더 좋은 소비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다. 시민사회의 향상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후나모토는 룸펜 프롤레타라이트는 그 어느 쪽으로부터 추방되고 있다. 일할 생각이 없다고, 더 좋은 가정생활과 소비생활을 바라지 않는다고 간주당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그저 룸펜이 배제되었다는 이야기뿐이다. 후나모토는 그들이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무기로 삼자라는 이야기다.

일하지 않는다. 일할 수 없다.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 아예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거기에 입각하여 살아갈 길을 생각하면 된다. 다른 입장, 즉 대중적인 입장에서는 이들은 시민사회로부터의 일탈이다.







폭동은 하층노동자의 자기표현이다. 시민사회로부터 발길질을 당한 그 분노를 그대로 겉으로 드러낸다. 차에 불을 질러도 좋고, 상점에 불을 질러도 좋다. 물론 투석도 괜찮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사용해도 된다. 되는대로 행동해서 어지럽히기만 하고 특별히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래서는 세상으로부터, 미디어로부터 사회적 지지를 얻기란 어렵다.







이 세상에 만연한 소비 논리를 공격하라. 인간의 기쁨을 돈으로 측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민사회를 망쳐 버리자. 일찍이 일용노동자가 했던 것처럼(아마 폭등을 뜻하는 듯) 묵묵히 화장실을 막히게 할 수 있을까. 벌써 조짐이 있다.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혼자서든 공동으로든 도시에 살든 지방으로 이주하든 부담 없는 장소를 찾아 되도록 돈을 쓰지 않고 생활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수고를 들이지 않고 자급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도 점점 더 발명되지 않을까.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2016.12.24 오전 2:34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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